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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 대칭화와 사물의 살갗 
이지양 작업의 미적 경쾌함

2016

김남시 | 이화여대

대칭(對稱)  

 

이지양 작가의 작업에는 유독 대칭(對稱) 형태가 자주 등장한다. 그녀는 작업 대부분에서 대칭적 쌍을 만들어낸다. <Listen to Silent>(2016)에는 푸른색 커튼을 가운데 두고 ‘Listen’과 ‘Silent’라는 글자가 서로 대칭을 이루고, <무제 : Pipes)>(2016)에는 상하 대칭으로 설치된 두 대의 모니터에 파이프 공을 위 아래로 주고받는 남녀의 영상이 등장한다. 영화 ‘Bird’와 ‘Josee, the Tiger and the Fish’의 특정 장면들을 만화경을 통해 투사해 보여주는 사진작업(2011)은 아예 데칼코마니를 핵심 모티브로 했다. 고양 오픈스튜디오 전시(2016)때 전시된 다수의 드로잉이나 사진 작업들 - 양쪽을 뾰족하게 깍은 연필, 선반 위와 아래 붙어있는 배드민턴 공, 출입문의 양쪽 손잡이, 꺾어진 벽을 사이에 둔 전기 플러그 등 – 도 대칭을 기본 원리로 삼고 있었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말린 종이, 개수대 위쪽과 아래쪽, 펼쳐진 종이와 구겨진 종이, 각기 반대 방향으로 누운 의자 사진들 역시 좌우 대칭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작가는 여러 종류의 사물들을 다양한 형태로 – 형태적, 공간적으로 - 대칭화 symmetrization 시킨다.  

‘symmetry’는 그리이스어 ‘symmetria’에서 연유하는데, 영어의 ‘with’에 해당되는 접두사 sym 과 ‘척도’를 의미하는 ‘metron’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단어다. 우리말로는 구체적인 맥락에 따라 “대칭” 또는 ‘균형’으로 번역되는데, 좁은 의미의 ‘대칭’은 비례 등과 같은 수학적 질서를 통해 성립되는 ‘균형’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1592년 알프레히트 뒤러가 쓴 책 <Della simmetria dei corpi umani>은 “인간 신체의 균형에 대하여” 혹은 “인간 신체의 대칭에 대하여”라고도 번역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대칭 symmetry은 오랫동안 서구의 예술을 지배해왔던 기본 원리였다. 비례와 대칭, 그를 통한 균형은 이상적인 인간 신체 뿐 아니라 조각과 건축 등 모든 아름다운 대상이 지녀야 할 객관적 속성으로 여겨져 왔다. 뒤러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인간 신체를 이상적인 대칭과 비례에 따라 묘사하고, 알베르티 같은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건축물에도 철저한 수학적 비례와 대칭을 적용하려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은 인간 신체를 포함한 우주 전체가 태초의 카오스 Chaos 상태를 극복하는 질서와 척도에 따라 창조된 ‘코스모스 Cosmos’라고 믿었고, 그렇게 질서잡힌 코스모스에서는 별들의 운동은 물론, 인간과 동식물을 포함한 만물의 형태까지도 일정한 규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대상들에 내재하는 이러한 우주적 질서와 조화, 균형과 대칭을 포착해 그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화가나 건축가들의 핵심과제로 여겨졌다. 

이러한 점에서 다양한 사물들의 대칭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이지양 작가의 작업은, 언뜻보면, 근대가 무너뜨린 질서잡힌 세계에 대한 믿음을 재소환하려는 시도인 듯도 하다. 작가는 “작업노트”에서 이렇게 쓰고있다.  

 

“대상의 모호함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업을 하는 과정에 어떠한 규칙이나 법칙을 적용한다. 제시된 방법을 따라가면 정해진 결과물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 – 명확한 답이 있다는 기대는 현실/대상에 대한 의심과 불안감의 해소를 돕는 방법이고 이러한 법칙을 작업 과정으로 적용시킨다.” (작업노트) 

 

불확실하고, 모호한 현실의 대상은 우리에게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고 예측 불가능한 카오스적 세계에서라면 인간은 그 불확실함과 불안을 견디며 살아가야 할 터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자신들이 맞닥뜨려야 할, 날 것의 세계에 특정한 질서와 규칙들을 부여함으로써 그 근원적 불안을 극복하고 세계를 이해 가능한 대상으로 전유(에른스트 카시러)하려 했었다. 그렇다면 이런 가설을 세워보자. 이지양 작가는 대상에 일정한 규칙이나 법칙을 적용시킴으로써 현실/대상의 모호함과 불안감을 해소하려고 하며, 그를 위해 작가가 택한 규칙 중 하나가 대칭이라고. 

 

대칭화(對稱化)의 역설  

 

<Unfolded figure 시리즈>에서 작가는 오리가미의 방법을 따르면서 종이에 대칭의 질서를 부가한다. 알다시피 종이접기는 종이를 반 또는 대각선으로 접는 대칭구조가 근본을 이룬다. 순서가 매겨진 종이접기 매뉴얼을 따라 가기만 하면 특정한 figure들이 만들어 진다는 점에서 종이접기는 모호하고 예측 불가능한 “현실/대상에 대한 의심과 불안감”을 해소해주는 괜찮은 방법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만들어진 피규어를 다시 펼쳐 unfold 보았을 때 생긴다. 종이를 접을 때 적용되었던 대칭적, 균형적 질서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펼쳐진 종이는 비대칭적이고 불규칙해 보이는 카오스적 조각들로 변해있기 때문이다. 대칭적 질서를 도입, 적용하는 것이 오히려 그 반대의 귀결로 이어지는 역설은 <‘EVERYONE SHOULD LOOK AROUND ANOTHER WAY>(2014)에서도 잘 드러난다. 작가는 바닥에 있는 종이와 벽에 붙은 종이 사이에 앉아 양쪽으로 다 쓸 수 있는 - 대칭적인! - 긴 필기구를 들고 바닥 종이에 ’EVERYONE SHOULD LOOK AROUND ANOTHER WAY’라는 글자를 쓴다. 그 손의 움직임이 필기구 다른 한 쪽을 통해 동시에 벽에 있는 종이에 전달되어 일정한 흔적을 만들어낸다. 모든 과정은 분명 어떤 대칭적 구조에 따라 이루어졌음에도 벽에 붙은 종이에는 불규칙적이고 혼란스런, 알아볼 수 없는 끼적거림 scribble의 흔적만 남는다. 이러한 작업 실험들로부터 작가가 도출해 낸 잠정적인 결론은 다음과 같다.   

 

“대상의 이해의 과정에서 나름의 당위성과 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방법으로 절대적인 방법들을 적용하지만 결과물은 여전히 명확하지 못하다. 어떠한 과정을 통하더라도 모순일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작업노트)

 

이쯤되면 우리는 이지양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이 무엇인지 짐작하기 시작한다. 작가는 사물에 숨어있는 대칭, 수학적이고 법칙적인 조화를 가시화시킴으로써 세계의 질서와 균형을 역설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칭과 균형의 질서를 극단적으로 사물에 적용시키면서 작가는 그것이 현실의 불확실함과 모호함, 예측불가능성으로 귀결되고 마는 역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수백년 동안 인류가 믿어왔던 코스모스로서의 우주의 질서, 그 질서의 증거이자 표현이라 믿었던 대칭과 조화를 현실 대상들에 적용시켜 보니, 오히려 현실의 불확실성과 모호함, 대칭적 질서로 환원되지 않는 다양성과 모순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지양 작가를 유명하게 만든 “Upside down” 시리즈도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작업에도 대칭의 원리가 적용되었음은 분명하다. 작가는 사람들을 거꾸로 세워 발목을 공중에 매달아 뒤집혀진 상태를 만드는데, 이 상태는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의 위치와 대칭관계다. 선반 위쪽과 아래쪽에 붙은 배드민턴 공 혹은 문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달려있는 손잡이처럼 사람을 위 아래로 대칭화시킨 것이다. 그리고는 <Unfolded figure>에서 접힌 종이를 펴듯 unfold, 찍혀진 사람들의 사진을 뒤집어 벽에 걸어놓았다. 그저 대칭화시켰을 뿐인데 사람들은 평상시 사진을 찍을 때의 포즈취함의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낯설고 어색하며 어딘가 뒤틀린 모호한 모습들을 하고 있다. 한 평론가는 이 작업을 “단순한 시각적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탈피할 수 있도록 감각을 낯설게 일깨우고 고민하는 동인(動因)으로 작용한다”(류동현)고 지적하나 내가 보기에 이는 절반만 진실이다. 이 작업의 의미는 작가의 전체 작업의 맥락 속에 위치 지워질 때 비로소 온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Upside Down> 시리즈가 보여주는 낯설음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여줌으로써 시각적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탈피하게 하는 초현실주의 계보와는 결이 다르다. 낯설게 하기만이 목적이라면 구태여 거꾸로 매다는 방법을 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이 사진들의 낯설음은 대칭의 규칙을 적용함으로써 생겨난 역설적 결과물인 것이다.   

 

사물의 살갗    

 

이지양 작가의 작업에서 사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색종이는 접힐 수도, 접힌 자국을 보여주며 펼쳐져 있을 수도 있다. 종이는 펼쳐진 상태로도, 구겨진 상태로도 존재한다. 포장지는 가로로 말렸을 때와 세로로 말렸을 때 서로 다른 모양으로 서 있다. “LISTEN”이라는 단어는 철자순서만 달리 조합되어 “SILENT”가 된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접혀진 종이, 바람에 날리는 풍선, 위 아래로 올라가고 내려가는 장난감 공(<Pipes>), 앞으로 혹은 뒤로 달려가는 개 <31 SdrawkcaB>(2004), 서로 자리를 바꾼 철자, 거꾸로 매달린 사람 등 이지양 작가가 사용한 대칭의 원리는 사물, 그것도 같은 사물이 이렇듯 여러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사물들의 존재방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개입한다. 종이는 작가의 Trans-figuration 을 거쳐 구겨진다. 서 있는 사람을 거꾸로 매단 것은 Trans-position 으로 정의할 수 있을 터인데, 이는 위 아래로 움직이는 공이나 거울을 통해 육각 대칭으로 변화된 영화 장면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바닥에 놓은 종이에 글을 쓰는 손의 움직임이 벽에 붙은 종이에 남긴 흔적은 Trans-scription의 결과라고 칭할 수 있고, 한 단어의 철자 순서를 다르게 조합해 다른 단어를 만들어내는 작업은 Trans-combination 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외에도 더 많은 존재 방식의 변화를 이 작가의 작업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다양한 사물의 존재방식을 추적하는 이지양 작가에게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는 것이 있다. 파괴와 소멸, 해체와 부패다. 작가의 작업에서 사물은 모양과 위치, 형태와 조합을 바꾸기는 하지만 결코 소멸되거나 해체, 파괴되지 않는다. <tweedledum tweedledee and the vantage loaf>(2015)에는 쥐덫에 붙들려 죽은 두 마리 쥐가 나오지만, 여기서 죽음은 소멸 또는 파괴로서가 아니라 다만 움직임의 정지로만 등장한다. 동물의 몸이 부패하여 해체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샘 테일러 우드에게서 드러나는 시간성은 산뜻하게 정지되어 있다. 영상 작업 <twinkle twinkle little star : little deaths without mourning>(2015)에서 전기 모기채에 접촉해 죽는 모기 역시 소멸이나 파괴로 보기는 어렵다. ‘반짝 반짝 작은 별’의 동요 가락에 맞추어 ‘타닥’ 소리를 내며 빛을 발하는 죽음의 순간은 해체나 소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화려한 변신, 그러한 점에서 Trans-formation 처럼 보인다.     

파괴, 소멸, 해체의 부재는 어쩌면 작가 작업의 근본 규칙인 대칭화의 필연적 귀결일지도 모른다. 대칭은 대상들의 현존을 전제한다. 대상이 소멸하거나 파괴되면 대칭화는 불가능하다. 사물의 현존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대칭화는 그 자체로 소멸, 해체, 붕괴를 배제한다. 어쩌면 작가는 소멸과 파괴, 해체와 부패를 사물들의 일반적인 ‘존재방식’의 하나로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 파괴된 것은 더 이상 ‘그 사물’이라 불리기 어려운, 완전히 새로운 존재 영역으로의 전환이기에 파괴, 해체, 부패된 사물은 그렇지 않은 사물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과 방법으로 다루어져야 할 문제라고. 오히려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변화들은 사물의 표면과 살갗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말이다. 

이지양 작가는 곰 인형이나 담요의 털을 뾰족한 핀들로 대체한 <Hold me tight>(2009)와 <Untitled : lullaby>(2011)를 선보인 바 있다. 언뜻 보기에는 얼굴을 부비고 싶을 만큼 부드러워 보이는 인형과 담요가 손가락을 대기도 주저되는 섬뜻한 사물이 된다. 이와 비슷하게 그녀는 봉제 인형을 푹신하게 만들어 주던 속 재료를 빼내고 남은 ‘껍데기’들만을 모아 나무에 난 구멍을 채우는 <Fill in project : tree wound>(2010/2011)도 수행하였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서로 대칭적 관계를 갖는 이 두 작업 모두에서 중요한 것이 사물(인형)의 표면(껍데기)과 살갗이었다는 것이다. 이 작업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접촉의 부드러움을 통해 우리를 위로해주는 것은 들여다보이지도 않는 내면 따위가 아니라 그 표면이고, 구멍난 상처를 채워 주는 것 역시 그런 살갗들이라고. 무겁고 완고한 사물의 물질성보다 그 표면과 살갗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에게는 더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이라고.    

어떤 법칙과 방법을 적용해보아도 결국 모호하고 불확실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면, 그에 대해 좌절하며 심각해지기보다 그 모호성과 불확실함을 가지고 경쾌하게 유희하는 길이 작가로서는 더 나은 선택일 것이다. 이것이 이지양 작가 작업에 미적 경쾌함을 부여한다. 그에게는 죽은/죽는 동물조차 가볍고 경쾌하게 다루어진다. 살아있는 존재의 죽음을 어떻게 작업화 할 수 있느냐는 값싼 도덕적 감상주의를 제외한다면, 우리가 ‘죽음’이라 일컫는 존재의 한 방식을 구태여 어떤 도덕적 치장이나 관념적 동정 같은 포장지로 감쌀 필요는 없다. 전기 모기채에 맞아 죽어가는 모기들을 ‘반짝 반짝 거리는 작은 별’처럼 바라보고, 등을 맞대고 죽은 쥐 두 마리를 ‘트위들덤과 트뒤들디’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모호하고 불확실한 세계를 등에 짊어진 우리에게 주어진 달콤한 능력일 것이다.